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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 떨어지는 꾹이네♥/재밌어

다정소감 * 김혼비 * 안온북스

by 매력덩아리 2022. 1. 10.

새해 첫 독서를 김혼비 작가의 신간으로 시작하다.
정말이지 다정하다 못해 만정(滿情)한 이야기들이 온 마음을 따끈하게 데펴준다.

목차에서부터 느껴지는 작가의 쫀득함💕 너무 사랑한다.

 

저장해 둔 페이지들+

p.71-72

한창 되는 일도 없고 하는 일마다 망해서 나 자신이 너무나 하찮고 쓸모없게 느껴져 괴롭던 시절, 소설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맞춤법 책을 읽다가 운 적이 있다. '쓸모 있다'는 띄어 쓰고 '쓸모없다'는 붙여 써야 문법에 맞으며, 그건 '쓸모없다'는 표현이 '쓸모 있다'는 표현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되기에 표제어로 등재되어 그렇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그래, 세상에는 '쓸모없다'를 쓸 일이 더 많은 거야! 쓸모없는 것들이 더 많은 게 정상인 거야! 나만 쓸모없는 게 아니야! 내가 그 많은 쓸모없는 것 중 하나인 건 어쩌면 당연한 거라고, 그러니 괜찮다고 멋대로 위로받고는 눈물을 쏟은 것이다.

 

p.75

남에게 충고를 안 함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 나는 이게 반복해서 말해도 부족할 만큼 두렵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입맛에 맞는 것들로만 만들어낸, 투명해서 갇힌 줄도 모르는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을 때, 누군가 이제 거기서 잠깐 나와 보라고, 여기가 바로 출구라고 문을 두드려주길 바란다. 때로는 거센 두드림이 유리 벽에 균열을 내길 바란다. 내가 무조건적인 지지와 격려와 위로로 만들어진 평온하고 따듯한 방 안에서 지나치게 오래 쉬고 있을 때, 누군가 '환기 타임!을 외치며 창문을 열고 매섭고 차가운 바깥 공기를 흘려 보내주기를 바란다.

 

p.88

옷 속에 깊숙이 들어가버린 허리 고무줄 끈의 끝부분을 옷감 위에서 가까스로 잡아 낑낑대며 구멍 밖으로 빼내는 것처럼, 기억 속 이미지를 끄집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어느 날 침대 위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지렁이가 기어 나오듯 스르륵 고무줄 끈이 바깥으로 나오며 선명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p.107-108

엊그제도 보았다. '한국에서 한국어로 쓰인 교과서로 정규교육을 받았을 텐데 맞춤법 틀리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는 대쪽 같은 의견을. 세상에는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같은 정규교육이라도 지역마다 교육 여건이 다르고, 정규교육을 소화해내는 학습 능력과 활자 민감도가 사람마다 다르며, 가정환경이나 건강 등의 요소가 방해로 작용하는 경우 정규교육에 집중할 수 있는 정도도 다를 텐데 어떻게 단언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눈에 '기본' 너머의 세계가 보이지 않는다고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닌데. 맞춤법 하나로 무시받아서는 안 되는 삶들이 도처에 존재한다. 당신 곁에도 나의 곁에도.

 

p.174

이 책들은 저마다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품고 있을까. 이 중 몇 퍼센트나 읽을 수 있을까. 마트롱의 책을 몇 번이나 더 읽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삶에 가능한 한 오래도록, 꼿꼿하게 머물고 싶어졌다.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몸에 좋은 것을 먹고 눈을 보호하며 나를 잘 돌보고 싶어졌다. 어떤 좋은 책들은 사람을 오래 살고 싶게 만든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p.118-119

말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조심한다. 상대방에게 애인이 있다는 걸 알지만 애인의 성별을 모른 채로 그 애인을 지칭해야 할 경우, 상대방이 여자라고 해서 "남자친구"라고 지레 말하지 않는다('애인'이라고 한다). 어떤 남성을 묘사하면서 "마치 사랑하는 여자에게 건넬 꽃이라도 고르듯이" 같은 표현도 서사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쓰지 않는다('사랑하는 사람에게'라고 쓴다). 그것들은 그들이 어떤 성적 지향인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그러니까 당연히 이성애자일 거라고 은연중에 전제하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말. 전제가 지워버리는 존재.

 

p.136

관심이란 달짝지근한 음료수 같아서 한 모금 마시면 없던 갈증도 생긴다는 것을, 함께 마실 충분한 물이 없다면 건네지도 마시지도 않는 편이 좋을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한다. 순간의 기분으로 문 너머 외로운 누군가에게 다가가려다가도, 가장 따뜻한 방식으로 결국에는 가장 차가웠던 그때의 내가 떠올라 발을 멈춘다. 끝까지 내밀 손이 아닐 것 같으면 이내 거둔다. 항상성이 없는 섣부른 호의가 만들어내는 깨지기 쉬운 것들이 두렵다. 그래서 늘 머뭇댄다. '그럼에도' 발을 디뎌야 할 때와 '역시' 디디지 말아야 할 때 사이에서. 이 사이 어딘가에서 잘못 디딘 발자국들 사이에서.

 

p.146-147

외국 항공사에서 승무원으로 일했던 기간은 내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상대적으로 짧았고 집 앞에 등장한 비행기처럼 조금 느닷없었기에 앞뒤 기억들과 분리된 채 독립적으로, 말하자면 별책 부록처럼 내 안에 존재해왔다. 오랫동안 한쪽에 밀어두고만 있던 이 부록이 동네에서 비행기를 마주칠 때마다 아무 페이지나 대중없이 활짝 펼쳐졌고, 다른 페이지가 더 읽고 싶은 날에는 비행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p.175

그는 영어가, 나는 일본어가 서툴러서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외국어 회화책에 나오는 피상적인 수준에 그칠 뿐이었지만, 어쩌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면 조그만 힘이 손에 쥐어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눈빛이었다.

 

p.192

나도, 나도, 나도요!!! 술은 끊겠지만 커피는 절대 못 끊는다요!!!!!

 

p.197

정말이지 이런 발상, 이런 쫀득함, 러블리하지 아니할 수 없다, 캬캬캬

 

p.199

"아, 의사가 곡기를 먹으라고 해서."

와. 나는 그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저렇게 가장 게으른 방식으로 부지런할 수 있다니. 가장 한심한 방식으로 현명할 수 있다니. 곧 죽어도 곡물로 밥을 지어 먹거나 식당에 들러 사 먹을 부지런은 없지만, 와중에 뻥튀기를 골라 사 먹는 부지런(이라고 할 수 있다면)은 있는 것이다. 대단해. 묘한 근성이 있어. 

 

p.218

정해진 주제 없이 이번에는 무엇을 써야 할까 고민할 때마다 기억의 윗부분에서 찰랑대며 당장 글이 되어 종이 위로 넘쳐흐르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p.220

주저앉고 싶은 순간마다 "내가 무능력했지 무기력하기까지 할까 봐!"라고 덮어놓고 큰소리칠 수 있었던 것도 내 안에 새겨진 다정들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게 붙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패턴을 반복해서 얻게 되는 건 근육만이 아니었다. 다정한 패턴은 마음의 악력도 만든다. 그래서 책 제목을 '다정소감'이라고 붙여봤다. '다정다감'을 장난스레 비튼 느낌도 좋았지만, 결국 모든 글이 다정에 대한 소감이자, 다정에 대한 작은 감상이자, 다정들에게서 얻은 작고 소중한 감정의 총합인 것 같아서. 내 인생에 나타나준 다정패턴 디자이너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보낸다. 디자인에 워낙 재주가 없는 나에게 다정한 부분이 있다면 그건 다 그들의 다정을 되새기고 흉내 내며 얼기설기 패턴을 만들어간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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